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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무너뜨리는 모든 것을 용서해본 적이 없다,

 

아주 일말의 약점도 물어야 했다.

가능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야 했다.

 

갈린 펜촉 끝과 잉크로 이루어진 세계만이 온전한 그의 것이었다.

 

 

 

알베르 크로스만의 것은 모두 좋은 것, 훌륭한 것, 우수한 것, 고귀하고 더없이 비싼 것들이었다. 모든 가구는 천 년을 산 고목으로 만들어졌고, 가장 유명한 장인의 손을 거쳤으며, 소모품인 잉크 하나마저도 일반 귀족들이 사용하는 ‘그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오랜 시간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그는 되찾았고 가져본 적 없던 것들도 가질 수 있었다. 가령, 제드 크로스만이 가지고 있던 옥새같은 것.

 

그의 집무실에 딱 하나 놓여있는 유일한 나쁜 것이라 함은, 네 번째 서랍 속의 낡은 편지 덩어리들이다.

 

양피지에 적당히 휘갈긴 그 편지 덩어리들은 어느 귀족, 아니 평민에게조차 보낼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나쁘고 불결해서, 설핏했다가는 자신의 약점이 되거나 스스로, 혹은 상대를 위험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한 번도 보내지 못한 편지의 수신인은 최악의 희망이자 희망에 대한 최초의 체념이었다.

 


첫 장

 

 

친애하는 케일 헤니투스 공자.

 

친애하는 케일 공자, 그간 잘 지내왔는지 모르겠군. 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접 찾아가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대를 서신으로밖에 볼 수 없는 점 양해하게.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대가 제국에서 해 준 희생 덕에,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 공자의 몸이 많이 상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네. 제국은 물론 로운 측에서도 공자에게 충분한 감사인사를 할 예정이네만, 제아무리 많은 재물이 이 고결한 마음에 비할까. 훈장을 주고 싶어도 그대가 원치 않으니 섭섭할 따름이야. 나의 친우가 한시 빨리 몸 상태를 회복하기를 바라네. 나도, 제국 민도, 고운의 국민도 모두 자네에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케일 공자, 나는 그대에게…. 이건 대필을 쓰도록 하지. 망할 자식, 네가 너무 똑똑하게 굴 때마다 짜증 나. 멍청한 놈.

 

 

 

둘째 장

 

어차피 이것들이 발송될 일은 없을 테니, 격식은 차리지 않는 걸로 하지. 상관없지 않나? 오뉴월의 바람이니 풀잎 향이니 하늘이니 하는 미사여구를 적던, 그대가 있는 곳에서 나와 같은 햇살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쓰든, 재수 없는 놈 와서 훈장이나 받아가라고 하든…. 자네에겐 다 똑같을 것 아닌가. 불필요하고 간지러운 소리는 적지 않는 것으로 하지. 벌써 표정이 상상이 가서 불쾌해. 불경한 표정이나 지어대겠지, 하. 이 나라에서 내게 그런 얼굴을 보일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케일 헤니투스……. 낯간지럽군, 그만두지.

 

 

 

셋째 장.

 

눈이 검은 자식.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도통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네 번째 장.

 

대체 무슨 눈치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 펜을 잡는데 누군가가 감시라도 하는 것 같아. 단순한 편지 한 장에 이 정도의 압박감이 드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 어린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편지를 아주 잘 쓰거든.

 

편지뿐만이 아니지, 부족한 점을 꼽으라면 열흘 밤을 새도 찾기가 힘들 걸. 나는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부족해 본적이 없어. 이 자리라는 것은, 일말의 약점이라도 보였다 하면 목이 날아가니 말이야. 겁을 먹어 본 적조차 없지. 수도의 들개 떼들은 공포의 냄새를 아주 잘 맡아서, 아주 조금이라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는 순간 사지를 물어뜯고 말 테니까. 완벽하게 감출 수 없다면, 만약 드러날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 있다면…. 상상하기에조차 끔찍하다고 적기엔, 너무 많이 상상해본 일이군.

 

그러니 애초에 감각을 죽이는 거야.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 감각이며, 우매한 왕들처럼 죽음과 자신이 분리되어있다고 믿지. 고개를 숙일 수 없이 태어난 인간인 것처럼……. 그리하면 정말로 무뎌져서 무엇도 두렵지가 않아, 그렇게 믿으면 어디서도 공포의 냄새는 새어 나오지 않지, 공포에서는 갓 구운 빵 같은 냄새가 나. 두려움에서는 썩은 고기 냄새가 나기도 하고. 비슷하지만 둘은 아주 달라. 하나는 아주 맛있는 먹잇감이고, 하나는 물어뜯기 좋은 피식자의 냄새지.

 

이만하지, 지금은 새벽이야. 편지를 쓸 시간이 통 나지 않는 게 슬프군. 보내지도 않을 편지야 언제 쓰던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만…. 달라. 언젠가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때가 오면 좋겠군.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고……. 있다고해도 나는 자네에게 쓰지않을 것이고, 자네도 내게 답장하지 않겠지만.

 


다섯 번째 장

 

간밤에는 비가 왔네. 비가 온다고 해도 왕성 안은 쾌적하니, 통 비가 왔다는 사실을 체감할 일이 없어. 눅눅한 공기도, 비 오는 날의 불쾌감도 없지.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알아채는 거지. 어릴 적엔 폭우가 두려웠고, 사춘기엔 폭우가 죄다 쓸어가 줬으면 좋겠다는 감상적인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수재 걱정밖에 되지 않군. 그럴 때면 내가 완전히 속물이 된 것 같아……. 자네에겐 고마운 게 많군. 늦었지만, 이 한마디를 적고 싶었네.

 

멍청한 놈아…….

 

PS. 건방진 놈, 영상 구를 기대서 받을 거면 그냥 잔 후에 아침에 보고해……. 허구헌날 피나 뱉으면서 실실 웃어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정말 탐탁지 않아서 내 머리가 이상해졌나 싶을 정도야.

 

 

 

여섯 번째 장.

 

넘겨받은 목줄은 잘 잡아두도록 하지. 어디서 이런 걸 잘들 물고 오는지 모르겠군.

 

일곱.

 

네 뼛조각을 밟고 있는 꿈을 꿨다. 언젠가 그래야 할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최후에 밟고 지나갈 뼛가루가 자네가 아니길 바라. 너만큼 편한 놈은 또 없거든.

 

내가 자네에게 은빛 패를, 동북부 군사명령권을 전적으로 넘겨준 것에 대해 후회하게 하지 말게. 이렇게 말하면 또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제 사람들은 어지간히도 강해서요, 따위의 말을 하겠지. 멍청한 놈,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내년 봄이 오면 내 대관식에 참여해야 할 것 아닌가.


 

여덟.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좋아.

 

 


 

아홉 장.

 

정신은 불 가속적이고, 인간은 진리를 주시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실제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개인이 부정하거나 사악하거나 특정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은 필연적으로 왜곡된 세계를 보기 때문이다. 가변적인 감각은 절대로 우리의 시신경이 진리를 주시하게 놔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타인이라 이름 붙인다.

 

그렇기에 군주의 자격을 논하려고 할 때 나의 어린 시절 스승은 군주란 왜곡을 이용할 줄 아는 자여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왜곡된 세계를 볼 때, 개인은 절대로 진실한 세계를 볼 수 없으므로, 문틈 사이에 난 아주 작은 1m 규격의 구멍으로 어린아이가 창밖을 훔쳐보듯 우리의 진실하지 않음을 알아채는 자만이 군림할 수 있다고.

 

나는 평생 고대의 낭만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사상에 주의를 가져본 적이 없어. 가령…. 하나의 영혼이 두 육체에 분리되었다거나, 그로 인해 평생 갈망과 갈증을 알게 되었다는 가엾은 신화들. 어떤 이들은 그런 신화를 철석같이 믿고 평생을 자신이 공명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떠돌다가 비참하고 고독하게 죽고는 하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목을 매는 일은 무의미해. 우리가 타인으로 존재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인간이 마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습게도,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대상을 정했어. 평생을 공명하며 존재의 다른,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신체기관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생각한 대상. 내게 그 대상은 로운이었다. 가장 바닥에 있을 때부터, 내게는 만들어진 듯한 욕구가 존재했어. 나는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고, 이제는 그렇게 되었고, 이 나라의 부국강병과 존재, 이 나라 백성들의 평안한 삶이 내 영혼의 일부인 것 같이 느껴졌다.

 

동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타고난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고, 어느 정도 자격이 되는 위치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이라면 늘 그렇지 않은가? 그런 인간은 숱하게 만나왔고, 그들이 가진 왜곡된 시야를 알아채는 것조차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역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모든 게 보인다. 새까만 무대의 장막 같은 놈. 무엇도 읽을 수 없는 네 눈이 아주 불쾌하고, 숨이 불쾌해. 절대로 내가 취하지 않을 방식을 취하는데도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아주 불쾌해. 어떤 미소로도 숨길 수 없고, 어설픈 척을 해도 모든 게 의미 없어져. 닮은 인간이 아니라, 평행선 위에서 유일하게 같은 선 위를 반대로 걸어오던 인간을 만난 것 같아.

 

우리의 인생이 아주 다른 궤도를 달려왔다는 점에서 정말 불쾌해.

대게 우리는 닮아선 안 되는 인간들이 아니던가.

 

넌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10장.

 

나의 허위를 무너뜨리지 말아 주게.

 

 

 

11장.

 

나는 내 생의 전부가 전쟁이라고 생각했어. 어지간해서는, 동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전쟁터는 감회가 색다르군. 이런 걸 대체 열여덟짜리가 어떻게 보고 있었던 건지. 검은 제복에 엉겨 붙은 피를 보니 소름이 끼치더군. 부분은 쌓아두기나 하고…. 종종, 이런 상황에서 부분 이야기를 하는 것도 끔찍하게 느껴져. 아무리 부분을 마신다 한들 치료될 뿐이지 통증이나 공포를 없애는 것은 아니지 않나.

 

밤이 이렇게 생생했던 적은 처음이야. 이런 곳인데도 창밖으론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초소에는 불빛이 하나둘 켜지더군. 밖에서는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있는 소리를 내며 울고, 밤은 음험한 빛을 내고, 이파리가 바람에 스치는데. 이런 게 전쟁터라니…. 전술회의는 새벽이 지나서야 겨우 끝났네. 이런 걸 어떻게 매번 하는 것인지. 기가 쭉 빨리는 것 같아. 밤이어서 더 감성적이 된 건지….

 

말라붙은 피가 그렇게 불쾌했던 적은 없어. 그러니까 나는…. 문득, 내가 자네와 나를 동일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네. 자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방패에 석창, 별 믿기 힘든 이야기가….

 

 

 

열두 번째 장.

 

 

인간은 타인의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인류는 서로서로 수단으로 씀으로 같은 죄를 범했고, 결국 서로를 목적 삼기로 했다. 만인은 만인의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수단으로 쓰기로 하자. 절대 목적이 되지 않는 배타적 타인, 같은 목적을 위한 영원한 수단으로.

 

 

 

열세 번째 장

 

미친놈이 용 님을 소개했다. 이름은 라온미르님. 작고 토실토실한 검은 용은……. 미친새끼. 완전히 돌아버린 새끼. 대체용을 언제 어디서 만난 거야? 심지어 하나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에르하벤님, 고룡……. 미친놈아. 알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죽는다는 이야길 갑자기 해? 그것도 3일 뒤에 죽는다는 걸? 미친것도 적당히 미쳐야 할 것 아니야?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3일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넌 불명예제대다. 전쟁 중에 사령관이 휴가를 쓴 대가는 목숨으로 가져와야 할 거야. 영원한 휴가를 줄 마음은 쥐꼬리만큼도 없으니. 내 대의에 널 대체할 패는 없어.

 


 

열넷….

 

..한순간이라도 널 순진한 놈으로 본 내가 바보 같군. 이런 일에 사소하게 분노하고 황당해 하는 게 순수한 줄 알았더니만, 속으로 머릴 굴리는 게 곧장 더 한 계략을 짜내는 거라니. 내가 멍청했지. 마음에 드는 놈,

 

 

 

열다섯….

 

지난밤에는 꿈을 꿨네. 열세 살 이후로 처음 꾸는 꿈이었는데, 너무 오랜만의 꿈이라 꿈이 꿈인 줄도 모르고 허덕였던 것 같아. 온 사방이 새까만 밤이었다. 바닥에는 새하얀 소금들이 깔렸었고, 나는 그 위를 맨발로 걸었어. 너무 어두워서 오히려 흰 것만 같았지. 한참을 걷자 하늘에서 천 조각이 떨어졌어. 창백한 빛을 내는 흰 천 조각이, 새처럼 나풀나풀 날아서 얼굴에 떨어지는 거야. 그제야 알았지. 아, 이게 뼛조각이구나.

 

발아래 부딪히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작게 응축된 결정들의 합. 이것들이 소금이나 유리, 부서진 돌 같은 게 아니라 뼛가루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지. 어두운 엘프의 뼈도 희게 빛날까? 이상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이내 알겠더라. 이건 너의 뼈였다. 발가벗겨진 맨발 아래에 만져지는 희고 단단하며 발바닥을 끝없이 찌르는 악의를 가진 흰 알갱이들. 분쇄 어진 너의 뼈. 공기가 아주 차가워서 입김이 나오는데 혼이 나오는 것 같았어. 왜 네 뼈가 나왔을까, 아직도 알 수 없다. 갈증이 일었어. 목이 아주 많이 건조해져서, 칼칼해진 허파로 숨을 쉴 때마다 뼛가루가 들이차는 것 같았어. 나는 너 역시도 나의 백성이라는 것을 가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네 눈이 두려워. 지겨운 놈….

 

 

열여섯.

 

 

겉가죽은 중요치 않다. 역사는 새로이 쓰는 법이며,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지 마라. 멋있지 않나? 나 참,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린지 모르겠네.

 

 

열일곱 번째….

 

최한은 꽤 영특한 자야. 네 뒤에 가려지지만, 훨씬 강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지 않은가. 이 모습을 아는 건 너뿐이지만. 그걸 보니 다시 놀랍더군. 도대체 어떻게 네가…. 처음 날 보자마자 알아채고 무턱대고 죽은 마나를 들이밀 수 있었던 건지. 살면서 형 소리가 듣기 좋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또 처음이네. 아래로 동생이 여럿 있지만,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뭣한 사이가 아닌가. 왕세자 저하지, 형은 아니야. 그들도 내게 동생이 아니고. 어떻게 밟고 눌러놔야 정원에서 잠든 새에 귀에 독을 부어 넣지 않을지를 고민하는 사이가 어떻게 가족일 수 있나?

 

그래, 난 너와 가족이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오고 싶어도 못 올 테니 미리 와본 건데, 그렇게 대놓고 한심하다는 듯이 볼 줄은 몰랐군.

 

 

열여덟 장.

 

인간이 고독 속에서 죽는 이유는 누군가 그에게 타인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고독하지 않은 상태를 모른다면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열아홉 장.

 

 

나는 감정을 날것으로 적어본 적이 없어. 감정은 언제나 벼려진 것, 다듬어진 것, 잘 갈려서 둥글어진 것이었다. 날것을 느끼는 게 천재들의 특징이라더니, 평생을 가도 천재가 될 일은 없겠군.

 

 

스무 장.

 

전신이 피범벅인 꼴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아. 오늘도 너 때문에 악몽을 꾼 줄은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유년을 채우는 다수의 기억은 희고 검은 것에 대한 고민이었어. 왜 빛나는 것, 흰 것, 금빛을 띄는 것들은 더없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보다 고결한가. 그것들은 불결하지도, 탁하지도, 부정하거나 천박하지도 않다. 광석 복도에 놓인 흰색 조각상과 자수를 놓은 흰 손수건이 주는 아름다움, 가을의 대사 각형이 가진 투명한 빛. 그것들이 유달리 아름답다는 사실은 숙련된 학자가 용인술에 대한 논평을 적어가는 것만큼이나 자명하고 명료했네. 누구도 태양을 거부하지 않고, 누구도 일주하는 별을 쫓기를 포기하지 않아. 사냥철이 다가올 무렵의 어느 겨울, 총포 소리가 울창하게 울리던 숲 속에서 무너지듯 내리던 햇살에 내가 매료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이었어. 그건 아주 투명하고 유려하고 악의적인 햇살이었어. 유리를 벼려 만든 칼처럼, 해가 없고 섬세하게 진실을 비췄어. 지금 여기에 비추고 있는 내가 누구냐고. 내가 누구냐고, 내가 어떤 나이냐고, 보이는 나는 누구냐고. 나는 나에 대해서 단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데도, 꽁꽁 언 호수 얼음에 비친 얼굴을 보니 지독하게 외로운 마음이 들더군.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금발 머리, 고운 왕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빛나는 머리카락, 푸른 눈. 탁하고 불경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그래, 나는 아름다웠고, 그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네 마치 원래 이랬어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강력한 군주의 자질을 가진 전형적인 왕자, 태양신의 은혜가 닿은 듯한 얼굴, 태양의 환한 빛을 내려줄 존재. 크로스만 왕가의 금발 벽 안. 나는 아마 관에서도 아름다울 테지.

 

 

 

스물하나.

 

나는 검은색을 꽤 좋아한다.

 

 


스물 둘.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여념 한 사람들은 평생을 이해할 수 없었네. 각자의 삶이 있다고들 하지만, 구태여 드러내 봐야 약점만 될 것을 왜 굳이 꺼내려고 할까. 그것만 숨기면, 들키지 않으면, 약간만 포기한다면 더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랑일 수도, 사회적 성공일수도, 대의일 수도 있겠지. 보통 예술가들이 많더군.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비정상성에 대해 고뇌하고, 평생을 그것과 싸우고, 약점을 여념 없이 보여주는 사람들이 말이야. 그거를 드러내지 않으면 스스로가 고립된 기분 속에 갇혀 고독하게 시들어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평생 가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 저럴까, 저 하나만 포기하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데. 운 좋게 그런 위치에 있는 인간들도. 자신의 나약한 점, 어쩔 수 없는 것, 용인되지 않는…. 그러나 숨길 수 있는 것 하나를 숨기지 않아서 몰락해갔네. 나는 운 좋게 이 나라의 왕세자로 태어났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철저히 숨겼네.

 

들키지만 않는다면 모든 걸 얻을 수 있으니.

 

 

 

다크엘프로써의 나 따위는 상상해본 적도 없어…. 나는 체념하는 데에 익숙하고, 그보다 수단을 취하는 데에 익숙한 부류의 인간이야. 로운은 내 그림자 같았어……. 내가 로운의 그림자였는지도 모르고. 하나의 욕심이라면 자식에게 같은 삶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 동반자에게 평생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답지 않게 쉬운 길을 포기하고, 조금 먼 길을 돌아가려고 했지.

 

그래서 자꾸 자네가 나를 슬프게 해. 상상 속에서조차 깊게 묻어뒀던 것들을 자꾸 파헤치는 것 같아. 몇 년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자꾸 현실로 만들어내지 않나. 타사가 햇볕 아래서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어두운 엘프는 어두운 엘프를 넘어서 영웅이 되어버렸지 않나. 그걸 보고 나서야 알 수 있더군, 인간은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걸.

 

자신의 본모습을 인정받고,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우습거나 무용한 것이 아니라, 본질에 가장 가까운 욕망이라는 것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어느새 더한 것을 바라고 있어. 이제는 기대까지 하게 되네, 네가 내게 그런 세상을 가지고 오리라고. 네가 가져오기만 하면, 다듬는 것은 내가 하지. 그때가 되면…. 이 지긋지긋한 마법은 풀어버리고, 테라스에 앉아서 레몬 차를 마시고 싶군. 바람이 구름을 흩는 여름에서, 시원한 여름용 리넨 셔츠를 입고서 전날 내린 빗줄기에 조금 젖은 땅을 내려다보고 싶어. 정원에선 풀냄새가 나고 피부가 검은 아이가 파운드 케이크를 먹고 있으면 좋겠어. 너무 덥거나 아주 습해도 좋다. 비 때문에 종일 우중충해도 좋아. 실내에서 빗줄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것 같네. 서류가 눅눅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겠지만…. 비가 그친 후에 스며드는 햇살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지개가 들어와도 좋겠지. 불경하기 그지없는 너를 소파에서 일으키고 다 그쳤으니 슬슬 가보라며 재촉하고 싶어. 아니, 그때 자네는 백수로 저택은 신을 할 때쯤이니 왕성에서 볼 일은 없겠군. 겨울이 되면 코트를 입고 눈길을….

 

감성적이군, 그만하도록 하지.

 

 

스물셋,

 

멍청한 놈…….

 


 

스물넷.

 

차라리 네가 다른 세상에서 온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대체 어디서 이런 게 떨어진 것인지, 이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이 편지를 쓰는 것도 이제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보 같은 짓이지, 몇 개의 단어는 지웠네. 처음 편지를 쓸 때엔, 쓰자마자 곧장 태울 생각이었어. 바보 같지 않나. 낭설이 도는 것도, 그 알베르 크로스만이 이렇게 감상적인 인간이라는 것도. 이런 걸 이용하려면 여느 공작 저의 영애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편이 좋았을 텐데, 친우에게 보내지도 않을 편지를 쓰는 왕세자는 너무 동화에나 나올 것 같지 않나. 결국, 한 장도 태우질 못했고 이대로 눌러두었군.

 

라온님을 생각해서 사과 주스를 갖춰둔 건 좋은 선택이었어. 나머지 묘족의 아이들 둘도 말이야. 혹시 몰라 준비해둔 게 도움이 되었군. 아무리 용 님이어도 아이는 아이라는 것인지……. 쓰고 싶은 말은 항상 서론을 중얼거리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군.

 

너는 잘도 평온히 자는구나. 소파에 누워있자니 허리가 아파 펜을 든다. 전에는 네가 눈을 감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전히 눈을 감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네 뼈는 아주 얇고 피부는 아주 창백한 종잇장 같아서 당장에라도 호흡이 멈출 것 같아. 그러나 네 숨을 확인하는 건 내 몫이 아니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네 눈은 검어서 아주 소름 끼쳐. 너는 컴컴한 암흑이고 암흑 틈에서 자꾸만 기어 나오는 선의고 극의 관객석 같다. 커튼을 들추면 뒤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야행성 들짐승처럼 내부를 볼 수 있는 게 불쾌했다. 내가 너를 읽는다는 것은 너도 나를 읽는다는 뜻이야. 그런데 이렇게 감긴 눈을 보니 이상해. 넌 정말 잠을 죽은 사람처럼 자니, 가능한 이른 아침에 눈을 떴으면 좋겠어. 새벽은 막처럼 얇고 연약하다. 네가 그렇게 희게 질린 건 처음 봐. 나는 죽었어야 한다는 말이 아주 싫어서 진저리를 쳤다. 우린 진작 죽었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나는 어릴 적에 독을 먹거나 테라스에서 머리가 거꾸로 떨어져 죽었어야 했고, 너는 망나니로 살다가 술독에 올라 죽었어야 할 운명인지 몰라. 그런데 결국에 우리는 운명을 유기했지 않느냐.

 

검은 제복에 말라붙은 핏물이 자주 꿈에 나온다. 우리는 불멸하지 않음으로써 무한한 삶을 상상해. 유한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인식하진 못하고,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지. 젊은 날에는 죽음을 실감할 수 없고 노년이 되어도 당장 내일 죽는다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네. 그런데 우리는 젊음을 넘어서 어린 날에 죽음을 실감하며 사는군. 사람의 수명이 100년이라, 누구는 스무 해를 겨우 살고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어.

 

나는 너를 믿지만, 네 사람까지 믿지는 않아. 이건 내가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신뢰네. 그들은 네 사람이지 내 사람이 아니니까. 나까지 마법을 풀면 이 방안엔 죄 검은 것밖에 없을 것 아닌가. 너는 속이 검고.

 

자라.

 

 

 

스물다섯.

 

이제 정말로 편지는 그만두려고 한다. 드문드문 쓰던 게 언제 이만큼이나 쌓인 것인지, 해가 뜨면 전부 난로에 던져버릴 생각이야. 편지는 이제 정말 끝이다.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이 바쁜데, 이게 다 네가 치고 다니는 사고 뒷수습 때문인 건 알지?

 

정말 네가 환생자라도 됐으면 좋겠군. 헤니투스 공 작가에는 유감인 일이지만, 나는 내게 관측되지 않는, 내가 아는 네가 아닌 네가 필요하지 않아. 만일 그렇다면 그 몸의 주인이 평생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되면 백수를 시켜주는 게 아니라 백수밖에 못 하는 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자네가 너무 편리해서, 인류가 종이를 처음 안 후 돌에 글을 쓸 수 없듯 그걸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우리가 서로의 왜곡을 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 분리된 두 세계를 살아온 자아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인식하고, 실망하고, 근원적인 다름에 서로를 질려 할 수 있을 때가 온다면, 사실 동류가 아니었단 사실을 아는 때가 온다면 좋을 텐데. 더는 정신이 공명하지 않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되면…. 자네가 환생자든 뭐든 그따위 진실에 충격받고 배신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자넨 이런 편지가 자네 앞으로 쓰였는지도 평생 모르겠지만…. 웃기지 않나. 나는 이런 모순적인 것들이 아주 재미있다고 느껴. 이건 아주 잘 짜인 농담……. 이게 뭡니까?”

 

케일 헤니투스는 한 손으로 편지 뭉텅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 마지막 장을 들어 올린 후 말했다. 감성적인 짓을 잘도 하시네요, 하자 알베르 크로스만이 허망한 얼굴을 했다. 자원 참, 웃긴 인간…. 수신인을 알 수 없는 한 뭉텅이의 편지는 그 알베르 크로스만이 썼다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이었다.

 

“남의 방에 들어와서 뭐하는 짓이야?”

“소지품 검사.”

“동생, 이게 무슨….”

“형이지. 내가 서른여섯…. 이 넘었지 이제?”

 

알베르의 인상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저놈 또 저러네, 하는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더위가 식어야만 여름이 낭만인 줄 알고 추위가 가셔야지 눈이 아름답다던 말처럼 평화를 좀 잃어본 후에야 고대하던 일상이 돌아왔다. 아이스박스 안의 유리병에 뜨거운 햇살이 비췄다. 안에 든 사과 주스가 얼음물 속에서 차가운 금빛으로 일렁였다.

 

유리병 바깥쪽에 맺힌 뜨거운 물방울에 반사된 햇살이 얼린 과즙처럼 들어있었다. 케일은 한 번 알베르를 무시하고는 나머지 편지의 장을 읽어내렸다. 알베르가 다급한 걸음으로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오자, 가까워진 얼굴에 갈색 피부가 달아오르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 다음으로…. 이게 다 몇 장이야. 케일 헤니투스, 이 미친…. 왜 세 장마다 욕이 나와요?”

 

“야!”